그는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는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이런 일들이 정당하고 합당하며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형진의 생각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비합리적이며 비현실적이며 비이성적이며 비논리적이다.
상식을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행동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는 본인의 잘못 뿐만 아니라 본인이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도록 집단과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을 실천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사람들에게도 그 책임이 없을 수 없다.
만약 힘이 없는 개인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럴 여건이 되지 못하면 생각으로 끝날 수밖에 없지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은 생각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능력도 되지 않는 사람을 혈육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세계회장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앉혀 놓아서 공감이나 용납이 되지 않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기행에 대해서도 속수무책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책임자로 세워진 자에 대해서는 막대기라고 하더라도 순종해야 한다는 종교적 문화 때문에 마음속에 수긍이 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참았었다.
만약 그 때 기행을 일삼을 때 제동을 걸었더라면 이런 상태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형진이 이런 기상천외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 곧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국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지도자의 자질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도자로 세운 부모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행동의 근원은 부모의 잘못된 선택이 분명하며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를 물질적으로 도와준 형이지만 부모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책임을 어떻게 추궁할 것이며 그 행동을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런 문제의 근원을 다 잘 알고 있고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줄도 알면서 근원적인 책임자에 대해서는 신성불가침이라고 생각하여 책임을 물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다.
책임이 있는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는데 무엇이 어떻게 개선되며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이슈를 만든 당사자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아무리 추궁하고 자제를 강조하더라도 그것은 소 귀에 경 읽기가 될 뿐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진을 잠잠하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말 탄 장수를 잡기 위해서는 말을 쏘는 것처럼 그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배경을 제거해 버리면 된다.
얼마든지 실정법을 이용하여 그의 행동을 제한 할 방법이 찾을 수 있겠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또는 다른 이유 때문에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앙의 영역을 벗어나는 행동에 대해서는 신앙적인 방법으로 대처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행동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형진만큼이나 섭리를 농단하고 있는 청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든지 책임추궁 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비신앙적이라면 당연히 비신앙적인 방법으로 제재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읍소(泣訴)를 하고 아무리 경고를 하여도 그쪽도 소귀에 경 읽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상식이 있고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섭리를 농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교회가 이렇게 사분오열이 되어 지리멸렬되어 가는 가장 큰 원인은 밑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아버님의 잘못된 판단과 아버님 사후에 섭리의 책임자로 있는 분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입을 열어서 말을 하지 않을 뿐이고 책임추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엉뚱한 사람들만 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북한이 저리 된 것은 누가 뭐래도 김일성 일가 때문임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법치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실정법을 이용하여 잘못행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얼마든지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를 비신앙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불효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침묵을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정말 섭리의 가치와 인류의 행복에 대한 가치가 신앙의 가치와 효의 가치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면 제동을 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방법을 찾으려는 마음도 의지도 없는데 어떻게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섭리의 길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신분이 어떻든지 그는 섭리의 길에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인 것이다.
섭리의 가치가 자장 크다면 섭리의 방향에 대치(對峙)가 되는 가치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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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원인인지를 알면서 그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신앙을 빙자한 가식적(假飾的)이고 위선적(僞善的)인 언어의 유희(遊戱)를 하는 사람들이다.
원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고민을 한다면 상황판단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스스로 알리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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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5일 월요일
의지의 없음과 무능함에 대해서 ..총기축복과 관련된 글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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